
20. 하나님 없이도 착하게 살 수 있는가 — 종교와 도덕의 관계
길을 걷다가 누군가 지갑을 떨어뜨렸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다. 지갑에는 적지 않은 돈이 들어 있다. 당신은 그것을 주인에게 돌려줄 것인가.
만약 돌려준다면 왜 돌려주는가. 경찰에 붙잡힐까 두려워서인가. 다른 사람이 보고 있을지 모르기 때문인가. 하나님이 보고 계신다고 믿기 때문인가. 아니면 아무도 보지 않고 어떤 보상도 받지 않더라도 ‘남의 것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인가.
이 작은 질문은 철학과 종교가 오랫동안 씨름해 온 거대한 문제로 이어진다.
“도덕적으로 살아가기 위해 인간에게 하나님은 반드시 필요한가?”
종교와 도덕은 오랜 세월 밀접하게 연결돼 왔다. 유대·기독교 전통에서는 하나님의 명령과 인간의 도덕적 의무가 강하게 결합되어 있었고, 십계명에서도 하나님에 대한 의무와 타인에 대한 의무가 함께 제시된다. 그러나 철학사에는 도덕의 근거를 종교와 구별하여 설명하려는 흐름 역시 존재해 왔다.
그래서 “하나님 없이도 착하게 살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단순히 신자와 비신자를 비교하는 질문이 아니다. 더 근본적으로는 ‘선과 악을 판단하는 기준은 어디에서 오는가’를 묻는 철학적 질문이다.
이 문제를 가장 오래된 형태로 던진 사람이 플라톤의 대화편 《에우튀프론》에 등장하는 소크라테스다.
질문의 구조는 단순하지만 강력하다.
어떤 것이 선하기 때문에 신이 그것을 원하는 것인가. 아니면 신이 원하기 때문에 그것이 선한 것인가.
이를 흔히 ‘에우튀프론의 딜레마’라고 부른다.
만약 어떤 행동이 오직 신이 명령했기 때문에 선하다고 말한다면 문제가 생긴다. 선악이 명령 하나에 따라 결정되는 자의적인 것이 아니냐는 반론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하나님이 ‘이미 선한 것’을 명령한다고 한다면 또 다른 질문이 생긴다.
그렇다면 선의 기준은 하나님의 명령과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인가.
현대의 신적 명령 이론은 이 문제를 피하기 위해 단순히 ‘명령했으니 선하다’고 주장하기보다 하나님의 선한 본성, 의지, 도덕적 의무 사이의 관계를 보다 정교하게 설명하려 한다.
따라서 신앙인에게도 중요한 것은 단순한 복종만은 아니다.
“하나님이 명령하셨으니까.”
여기에서 사고를 멈춰버리면 신앙은 오히려 도덕적 성찰을 차단할 위험이 있다. 내가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 정말 하나님의 뜻인지 끊임없이 물어야 하기 때문이다.
종교적 확신이 곧 도덕적 정당성을 자동으로 보장하지는 않는다.
근대철학자 칸트는 이 문제를 다른 방향에서 바라보았다.
칸트에게 인간이 도덕적 행동을 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보상을 받기 위해서도, 처벌을 피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도덕법칙은 이성적 존재에게 그 자체로 의무를 요구한다. 칸트 윤리학에서 인간은 외부의 명령에 끌려다니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에게 적용되는 도덕법칙을 이성을 통해 인식하고 따르는 자율적 존재다.
예를 들어 거짓말하지 않는 이유가 “하나님께 벌 받을까 봐”라면 행동 자체는 옳더라도 그 동기는 아직 타율적일 수 있다.
“거짓말은 다른 사람을 내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해서는 안 된다.”
이렇게 판단하고 스스로 책임을 받아들이는 데서 도덕적 자율성의 문제가 등장한다.
흥미로운 점은 칸트가 이를 통해 하나님을 단순히 제거하려 했던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칸트에게 도덕의 기초는 종교와 독립적이지만, 그의 철학에서 도덕과 종교는 다시 중요한 관계를 맺는다. 그는 도덕적 실천과 ‘최고선’의 문제를 통해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갖는 의미를 논의했다.
따라서 칸트의 질문은 “하나님이 없으니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가 아니다.
오히려 훨씬 엄격하다.
아무도 보지 않아도 옳은 일을 할 수 있는가.
무신론자는 선할 수 없다는 주장은 현실과도 맞지 않는다
현실에서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도덕적 행동을 단순히 동일시하기는 어렵다.
퓨리서치센터가 2019년 34개국 3만8천여 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도덕적이고 좋은 가치관을 갖기 위해 하나님을 믿는 것이 필요한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국가와 종교적 배경에 따라 크게 달랐다. 즉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도덕성의 관계를 사람들이 이해하는 방식 자체가 사회와 문화에 따라 상당한 차이를 보였다.
따라서 “신을 믿는 사람만 선하다”거나 반대로 “종교는 도덕에 필요 없다”고 한 문장으로 결론내리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하다.
비신앙인도 공감, 양심, 이성, 인간 존엄, 상호성, 공동체적 책임 등을 근거로 타인을 돕고 희생할 수 있다.
동시에 종교는 오랜 역사 속에서 인간에게 강력한 도덕적 언어와 공동체적 실천을 제공해 왔다. 인간의 존엄, 가난한 사람에 대한 책임, 용서와 자비, 자기희생 같은 가치가 종교적 전통 안에서 지속적으로 해석되고 실천되어 온 것도 사실이다. 서양철학의 도덕 언어 자체도 오랫동안 종교와 긴밀하게 얽혀 발전했다.
따라서 질문을 바꾸어야 한다.
“종교가 있어야 도덕적인가?”가 아니라 “종교는 인간을 어떤 방식으로 더 도덕적인 존재가 되도록 하는가?”라고 말이다.
여기서 기독교 신앙에는 더 어려운 질문이 남는다.
기독교의 목적은 단순히 ‘착한 사람 만들기’인가.
그렇다면 신앙은 결국 하나의 도덕교육 프로그램과 크게 다르지 않게 된다. 교회에 다니는 이유도 ‘나쁜 짓 하지 않고 착하게 살기 위해서’ 정도로 축소될 수 있다.
그러나 기독교가 말하는 신앙은 도덕적 행동만으로 모두 설명되지 않는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은총, 죄와 용서, 사랑과 구원이라는 더 넓은 차원이 존재한다. 기독교 전통에서 하나님과 도덕의 관계 역시 단순한 명령과 복종으로만 설명되어 온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의 응답이라는 관계적 차원이 함께 존재해 왔다.
그래서 신앙의 질문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나는 벌을 피하려고 선한 일을 하는가.
천국이라는 보상을 얻으려고 사랑하는가.
사람들에게 좋은 사람으로 인정받기 위해 봉사하는가.
아니면 아무런 보답이 없어도 타인의 고통 앞에서 책임을 느끼는가.
이 차이는 중요하다.
종교가 인간을 선하게 만들 수도 있지만, 때로는 자신의 선함을 확신하게 만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는 하나님을 믿으니 옳다”는 확신이 타인을 판단하고 배제하는 근거가 되는 순간 종교와 도덕의 관계는 뒤집어진다.
신앙은 도덕적 우월성을 증명하는 자격증이 아니다.
오히려 신앙은 끊임없이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나는 정말 타인을 사랑하고 있는가.
결국 “하나님 없이도 착하게 살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철학은 하나의 목소리로 답하지 않는다. 도덕의 근거를 인간의 이성이나 인간적 삶의 조건에서 찾는 전통도 있고, 도덕적 의무의 궁극적인 근거를 하나님과 연결하는 철학적·신학적 전통도 존재한다.
그러므로 신앙인과 비신앙인을 세워놓고 누가 더 착한지 경쟁시키는 것은 이 질문의 핵심에서 벗어난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믿는 것이 나를 어떻게 살게 만드는가이다.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타인의 고통에 무관심할 수 있다. 종교가 없으면서도 어려움에 빠진 낯선 사람을 위해 자신의 시간과 돈을 내놓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신앙인은 “나는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선하다”고 말하기보다 더 불편한 질문을 자신에게 던져야 한다.
내가 믿는 하나님은 나를 더 정직하게 만드는가.
더 겸손하게 만드는가.
약한 사람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게 만드는가.
나와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게 만드는가.
‘하나님 없이도 착하게 살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결국 ‘무신론자가 착할 수 있는가’를 심판하는 질문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오히려 신앙인에게 되돌아오는 질문이어야 한다.
하나님을 믿는 나는, 그 믿음 때문에 어떤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가.
그 질문 앞에서 종교와 도덕은 비로소 논쟁의 대상에서 삶의 문제로 바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