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I에게 물어보면 되잖아.”
생성형 인공지능이 빠르게 확산하면서 이제 이런 말은 낯설지 않다. 궁금한 개념을 설명받고 긴 자료를 요약하거나 글의 초안을 만드는 일도 가능하다. AI가 답을 찾는 시간과 노력을 크게 줄이면서 교육에도 새로운 질문이 생겼다.
AI의 도움으로 빠르게 답을 얻을 수 있는 시대에 아이들은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여기서 주목할 개념 가운데 하나가 ‘GRIT(그릿)’이다. 심리학자 앤절라 더크워스(Angela Duckworth)와 연구진은 2007년 ‘Journal of 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에 발표한 연구에서 GRIT을 ‘장기적인 목표를 향한 끈기(perseverance)와 열정(passion)’으로 정의했다.
다만 GRIT 하나가 학업이나 미래의 성공을 결정한다고 볼 수는 없다. 2017년 같은 학술지에 발표된 메타분석에서는 GRIT이 기존 성격 특성인 성실성과 상당 부분 관련돼 있으며, GRIT 가운데서도 ‘노력의 지속(perseverance of effort)’이 성과와 더 밀접하게 연관될 수 있다는 분석이 제시됐다.
국내에서는 김주환 교수가 GRIT을 자녀교육과 성취의 관점에서 보다 확장해 설명해왔다. 김 교수는 2025년 전면 개정한 『그릿 GRIT』에서 GRIT을 단순히 참고 버티는 힘이 아니라 자기조절력, 대인관계력, 자기동기력이 함께 작동하는 ‘마음근력’의 관점에서 바라본다.
이는 Duckworth의 원래 구성(끈기+열정)과 구분되는 한국적 재해석이다. Duckworth 모형은 ‘Consistency of Interest(관심의 일관성, 일명 열정)’와 ‘Perseverance of Effort(노력의 지속, 일명 끈기)’의 2요인으로 구성되며, 대인관계력을 공식 하위요인으로 포함하지 않는다. 반면 김주환 교수의 GRIT = Growing through Relatedness(대인관계) + Intrinsic motivation(자기동기) + Tenacity(끈기/자기조절)로, 국내 교육·양육 맥락에서 ‘마음근력’으로 재정의한 확장 프레임이다.
따라서 GRIT을 성공의 공식으로 받아들이기보다 아이가 스스로 목표를 세우고 지속적으로 성장하기 위해 필요한 여러 역량을 살펴보는 하나의 관점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정답 찾기에서 질문과 판단으로
생성형 AI는 정보를 찾고 정리하는 시간을 크게 단축한다. 그러나 정보에 빠르게 접근하는 것과 그 정보를 제대로 이해하고 판단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AI가 사실과 다른 내용을 그럴듯하게 제시하거나 편향과 오류가 포함된 답을 내놓을 가능성도 있다. 따라서 AI 시대에는 질문하는 능력과 함께 결과를 검토하고 다른 근거와 비교해 판단하는 역량이 필요하다.
유네스코(UNESCO)는 2023년 발표한 「Guidance for generative AI in education and research」에서 생성형 AI의 교육적 활용에 대해 인간 중심 접근과 학습자 주체성(인간 주체성, human agency) 보호를 핵심 원칙으로 제시했다. 구체적으로 학습자의 내적 동기 보호, 인간 통제와 책임 강화, AI 생성 정보에 대한 비판적 평가와 검증, 연령에 맞는 적절한 사용, 데이터 프라이버시 보호 등을 권고한다.
따라서 교육의 질문도 ‘AI를 사용할 것인가’에서 ‘AI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로 옮겨갈 필요가 있다. 과제를 받자마자 AI에게 완성된 답을 요구하는 것과 먼저 자신의 생각을 정리한 뒤 AI의 답과 비교하는 것은 다르다. 후자의 경우 AI는 생각을 대신하는 존재가 아니라 사고를 확장하고 점검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
부모와 교사도 “AI가 뭐라고 답했니?”에서 멈추기보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그 답이 맞는지는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라고 물을 필요가 있다. 정답이 많아질수록 질문하고 판단하는 능력의 가치는 더욱 중요해질 수 있다.
GRIT은 무조건 버티는 힘이 아니다
GRIT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정신력’ 으로만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김주환 교수의 GRIT 관점도 이 대목에서 참고할 만하다. 김 교수는 개정판 『그릿 GRIT』에서 공부를 고통을 참아내는 과정으로만 보는 관점에서 벗어나 자기동기와 자기조절을 포함한 마음근력을 강조한다.
이는 AI 시대 교육에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 아이에게 “무조건 끝까지 해” 라고 요구하는 것보다 왜 이 일을 하는지 스스로 의미를 찾고, 목표를 향해 자신의 행동을 조절하며, 실패했을 때 다시 시도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잘못된 목표라면 수정할 수 있고 현재 방법이 효과적이지 않다면 전략도 바꿀 수 있다.
AI 시대에 GRIT에서 주목할 부분은 ‘어려움을 만났을 때 다음 행동을 선택하는 힘’이다. 실패했다고 “나는 못해”라고 단정하기보다 원인을 살펴보고, AI가 제시한 첫 번째 답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 다른 가능성을 탐색하며, 방법이 실패했다면 전략을 수정해 다시 시도하는 것이다.
결국 GRIT은 끈기 하나만의 문제가 아니다. 자기조절, 내적 동기, 판단과 목표 설정 등 여러 역량과 함께 바라볼 필요가 있다.
AI가 빨라질수록 필요한 ‘생각의 시간’
AI의 가장 큰 특징 가운데 하나는 속도다. 몇 초 만에 답을 얻고 문장을 만들며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안받을 수 있다. 그러나 교육에는 효율성만으로 평가하기 어려운 시간도 있다. 문제를 고민하고, 자신의 방법이 틀렸음을 발견하고, 실패한 결과물을 다시 고치는 시간이다. 이 과정에서 아이는 자신의 사고를 점검하고 새로운 방법을 찾는다.
AI를 사용할 때도 바로 정답을 요구하기보다 먼저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게 할 수 있다. 이후 “정답 대신 힌트를 알려줘”, “내 생각에서 잘못된 부분을 찾아줘” 라고 질문하고 AI의 설명을 신뢰할 만한 자료와 비교하는 것이다. 이때 AI는 사고를 대신하는 존재가 아니라 사고를 돕는 도구가 된다.
김주환 교수가 강조하는 자기동기와 자기조절의 관점에서 보면 중요한 것은 단순히 오래 버티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힘을 갖는 것이다. AI가 아무리 좋은 답을 제공해도 배우고 실행하는 주체가 아이 자신이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부모도 ‘정답 제공자’ 에서 벗어나야
아이에게 문제가 생길 때마다 부모가 즉시 해결하면 당장의 결과는 좋아질 수 있다. 하지만 아이가 스스로 계획하고 실수하며 수정하는 경험은 줄어들 수 있다. 그렇다고 실패를 방치하라는 의미는 아니다. 아이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에서 스스로 해결할 기회를 남겨주는 것이 중요하다.
부모의 질문부터 달라질 수 있다. “왜 이것도 못 했어?”보다 “어디까지 해봤어?” 라고 묻고, “내가 해줄게”보다 “네가 생각한 방법은 뭐야?” 라고 질문하는 것이다. 실패했을 때는 “다시 한다면 무엇을 바꿔볼래?” 라고 물을 수 있다.
김주환 교수가 GRIT을 자기조절력뿐 아니라 자기동기력과 대인관계력까지 포함하는 마음근력으로 설명한다는 점도 부모교육에서 눈여겨볼 부분이다. 아이 혼자 악착같이 견디게 하는 것이 아니라 건강한 관계와 내적 동기를 바탕으로 스스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관점이기 때문이다.
GRIT은 거창한 프로그램에서만 길러지는 것이 아니다. 생각하고 시도하고 실패한 뒤 다시 해볼 수 있는 경험을 일상에서 보장하는 것부터 시작할 수 있다.
AI 시대, GRIT을 다시 묻다
AI가 발전할수록 인간에게 필요한 능력이 단순히 줄어든다고 보기는 어렵다. 무엇을 AI에게 맡길지 판단하고, AI가 제시한 정보를 검증하며, 자신의 목표를 설정하고 실패했을 때 방법을 수정하는 능력은 오히려 중요해질 수 있다.
물론 미래에 필요한 것은 GRIT 하나가 아니다. 창의성, 비판적 사고, 자기조절, 협업, 의사소통, AI 리터러시 등 다양한 역량이 함께 필요하다.
더크워스의 연구가 장기적인 목표를 향한 열정과 끈기에 주목했다면, 김주환 교수의 GRIT은 이를 국내 교육과 자녀 성장의 맥락에서 자기조절력, 자기동기력, 대인관계력이라는 마음근력의 관점으로 확장해 생각할 여지를 제공한다.
두 관점을 AI 시대에 대입하면 한 가지 질문으로 모인다. 쉽게 답을 얻을 수 있는 시대에도 아이는 스스로 목표를 세우고, 생각하고, 행동하며 계속 성장할 수 있는가.
AI는 답을 제안할 수 있지만 무엇을 질문할지는 사람이 결정한다. AI는 계획을 만들 수 있지만 실행하는 주체도 사람이다. 실패 원인을 분석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지만 다시 시도할지 결정하는 것 역시 사람의 몫이다.
정답을 얻는 시간은 점점 짧아지고 있다. 그러나 답을 얻는 것과 배우고 성장하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니다. 그럴수록 교육은 아이가 스스로 질문하고 생각하는지, 실패와 어려움 앞에서 방법을 바꿔 다시 시도할 수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
AI가 답을 제공하는 시대에도 자신의 목표를 세우고 그 과정에서 배우며 끝까지 나아가는 주체는 결국 사람이다. AI 시대에 GRIT이 맡게 될 역할도 바로 여기에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