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미술의 수많은 흐름 속에서 전통적 매체와 현대적 소재의 과감한 융합을 통해 독창적인 조형 세계를 구축해 온 김규헌 작가. 유화와 파스텔이라는 고전적 회화 기법에서 출발해 최근 '유리와 빛', 그리고 다양한 혼합재료를 활용한 입체적 평면 회화에 이르기까지, 그의 작품 세계는 멈추지 않는 탐구와 변신의 연속이었다. 피사로의 작품에서 받은 유년 시절의 미학적 감동을 시작으로 구상과 비구상의 경계를 허무는 끊임없는 실험을 거쳐 온 그가, 이번에는 '유리와 빛의 굴절'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관람객들에게 깊이 있는 존재론적 화두를 던지고 있다.
◆피사로의 ‘눈 풍경’에서 시작된 예술적 본능과 깊이 있는 스펙트럼
김규헌 작가가 평생을 바칠 예술가의 길을 걸어가기로 결심한 결정적 계기는 중학교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인상주의 거장 카미유 피사로의 대표작 『루브시엔의 베르사유로 가는 길, 눈 풍경』을 처음 접했을 때 느꼈던 시각적 충격과 따뜻한 감동은 어린 소년의 가슴속에 강렬한 예술적 열망의 씨앗을 심었다. 눈 덮인 길 위로 떨어지는 빛의 분쇄와 자연이 머금은 온기를 화면에 담아낸 피사로의 시선은, 이후 김규헌 작가가 회화를 바라보는 근본적인 태도이자 미학적 기초가 되었다.
이 깊은 감동은 그를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진학으로 이끌었고, 정통 회화의 기틀을 탄탄히 다지는 양분이 되었다. 그러나 대학 졸업 후 그의 행보는 특정한 학풍이나 장르에 안주하지 않았다. 인물화와 풍경화 같은 정통 구상 회화에서부터 대담한 추상적 조형 언어를 사용하는 비구상, 나아가 한국 전통 민화의 해학적 재해석에 이르기까지 스펙트럼을 끊임없이 확장해 나갔다.
특히 파스텔이라는 매체를 자유자재로 다루며 보여준 섬세한 색채 감각과 유화 및 혼합재료의 현대적 재해석은 평단과 미술계의 큰 주목을 받았다. 1999년 문화관광부 장관상 및 대한민국 미술전람회 대상을 거머쥐며 작가로서의 입지를 공고히 한 그는, 대한민국 미술대전 특선 3회 및 입선 2회, 동아미술제, MBC미술대전 등 국내 유수의 공모전에서 잇따라 수상하며 그 독보적인 예술적 깊이를 입증해 냈다.
◆장자의 ‘눈(視)’에서 얻은 철학적 사유와 조형적 완성
최근 김규헌 작가가 모든 내공을 집약하여 집중하고 있는 화두는 ‘유리와 혼합재료’를 결합한 다층적 조형 표현이다. 그에게 유리는 단순히 물체를 비추는 투명한 재료나 차가운 산업 물질이 아니다. 그것은 빛을 받아들이고 반사하며, 투영과 굴절을 거쳐 현실과 환상이 교차하는 또 다른 공간을 창조해 내는 ‘생명력 있는 매개체’다.
이 연작의 핵심 철학은 동양 고전 철학인 장자의 ‘눈(視)’ 개념과 맞닿아 있다. 장자가 강조한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의 무한함, 즉 고정된 시선에서 벗어나 바라보는 위치와 고도, 마음에 따라 세상의 진실은 얼마든지 다르게 존재할 수 있다는 깨달음이다. 김규헌 작가는 이를 시각화하기 위해 유리 표면 아래 수많은 레이어와 아교 기법, 텍스처를 겹겹이 쌓아 올렸다. 관람자가 작품 앞으로 다가설 때, 빛이 스치는 각도와 시선에 따라 작품은 매 순간 완전히 새로운 이미지와 색채를 파동처럼 뿜어낸다.
“유리는 비추고, 투영하며, 굴절을 통해 또 다른 세계를 만들어내는 매개체다. 장자의 ‘눈’처럼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은 하나가 아니며, 보는 위치에 따라 현실은 끊임없이 달라진다. 관람자들이 작품 속 빛과 환영의 경계에서 각자의 시선으로 새로운 존재의 의미를 발견하기를 기대한다”
이처럼 그의 근작들은 화면 내부에서 빛이 스스로 스며 나오는 듯한 착시를 일으키며, 관람자로 하여금 단순히 그림을 ‘보는’ 행위를 넘어 ‘생각하고 거니는’ 철학적 경험을 선사한다.
◆견고한 기술성과 공공 미술로서의 확장성
김규헌 작가의 이번 연작이 지닌 또 다른 미덕은 뛰어난 ‘기술적 견고함’과 ‘공공 공간과의 조화’에 있다. 유화나 파스텔, 유리와 같은 이질적인 재료들을 결합하는 작업은 재료 간의 수축률과 접착성 문제로 인해 고도의 숙련된 기술을 요한다. 작가는 전통 아교 접착 기법과 현대적 유리 조형 기법을 오랜 연구 끝에 결합해 내구성을 획기적으로 끌어올렸다. 변색이나 손상의 위험을 최소화하면서도 예술적 깊이를 유지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러한 특성 덕분에 그의 작품들은 평면 회화가 가진 한계를 가볍게 뛰어넘는다. 공간의 조명 및 자연광과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는 조형성을 품고 있어, 미술관이나 갤러리라는 제한된 공간을 넘어 대형 건축물 로비, 주거 및 상업 공간, 공공기관 등 대중과 호흡하는 다양한 공공 공간의 품격을 한 단계 높여줄 수 있는 조형 예술품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빛과 굴절이 빚어낸 존재의 깊이
유년 시절 피사로의 캔버스 위에서 반짝이던 빛의 파편은, 오늘날 김규헌 작가의 손에서 유리와 혼합재료를 통과하며 더욱 깊고 다층적인 존재론적 질문으로 진화했다. 고정된 시각을 거부하고 끊임없는 장르적·재료적 실험을 감행해 온 그의 행보는, 현대 미술이 지향해야 할 인문학적 깊이와 기술적 성취의 모범적인 궤적을 보여준다.
특히 유리의 투영과 굴절이라는 현대적 물성을 통해 ‘보는 방식’에 대한 근본적인 철학적 성찰을 이끌어낸 점은 그의 예술 세계가 지닌 가장 큰 독창성이다. 이는 차가운 물질 속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작가만의 고유한 연금술이라 할 수 있다.
관람자는 그의 작품 앞에 서는 순간 비로소 깨닫게 된다. 우리가 마주하는 세상의 진실은 단 하나가 아니며, 빛과 시선이 만나는 그 경계마다 무한한 세계가 숨 쉬고 있음을 말이다. 앞으로 김규헌 작가가 펼쳐 보일 빛과 물질의 교감, 그리고 그 속에서 피어날 존재의 심연을 향한 여정이 더욱 기대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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